외출


외출
김형경 저

가슴 속 깊이 나오는 한 숨과 가끔씩 턱턱 막혀오는 답답함에 조금은 우울함에 빠지게 만들었던 소설.

대부분이 그러하겠지만 영화 외출보다는 소설 외출이 가슴을 더 먹먹하고 주인공들의 울부짖음이 온 몸으로 느껴지게 만들었다.

한 남자와 여자가 만나다.
그들이 만난 곳은 응급실 앞 대기실.
한 남편의 아내로서 한 아내의 남편으로서 각각의 타인으로서 만났다.
그리고 그들이 알지 못했던 그들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선으로 만났지만 처음 느껴보는 설레임.
시간이 갈수록 그를 향한 서영의 사랑은 커져 가기만 했다.
나날이 커지는 사랑에서 알아버린 그의 배신.
타인의 수근거림을 통해 낯뜨거운 동영상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버릴 정도로 부품이 고장난 기계마냥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가질 수 없었던 노랑색의 활기를 가지고 있는 그녀.
그녀로 인해 자신의 생에 활기를 더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 이런 비밀이 있었다니.
출장인 줄로만 알았던 그녀의 지방행이 휴가였다니.
조용히 그녀의 침상 앞에 "차라리 죽어버리지 그랬니"하고 조용히 말을 하는 그에게서 그 무엇도 더할 수 없는 암울한 그림자가 있었다.

정말 말도 안되는 인연을 통해서 만난 인수와 서영.
"냉장고에 물 있습니다"
가볍게 흘려버릴 수 있는 메세지에서 그는 그녀에게 보이지 않는 배려를 느꼈고.
장난스럽게 시작한 복수가 커다란 짐이 되고 마음의 한 부분을 자리 잡았다.

개인적으로 김형경이라는 작가를 무척 좋아한다.
단편소설은 잘 읽혀지지 않는지라 머라 할 수 없지만...
전작인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를 시작으로 그녀의 팬이 되버리고 말았다.
영화 외출로 먼저 알아버린 이 이야기를 김형경이라는 작가가 아니었으면 사보지도 않았을 책이었다.
그녀의 소설 답게 주인공의 심리묘사가 섬세하게 묘사되었으며.
영화 속에서 가질 수 없었던 절절한 감정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p.26
단 하나의 버튼을 눌렀을 뿐인데 모든 것이 무너져내렸다. 5년간의 결혼 생활만이 아니었다. 인간에 대한 신뢰, 사랑에 대한 확신, 생에 대한 비전이 함께 무너지고 있었다. 동시에 온 세상이 정전되었다. 암흑 속에서 서영은 온몸이 굳어가는 것을 느끼면서 오래도록. 가만히 앉아 있었다.

p.55
낮에 중환자실로 수진을 면회 갔을 때 인수는 얼굴 근육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광대뼈며 입가의 근육이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면서 얼굴에 분노와 울분의 표정을 만들어냈다. 거울을 보았다면 아마도 낯선 괴물을 만났다고 여겼을 것이다.
"너, 차라리 죽어버리지 그랬니?"

p.101
요즈음 서영은 그동안 자신이 사랑을 해본 적이 없음을 알았다. 연인 역할, 아내 역할은 해보았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사랑은 아니었다. 가슴에 선혈이 맺히도록 뜨거워지다가 석류처럼 갈라지고 마는, 태양이 빛나고 파도가 해변을 쓰는 것의 의미가 다르게 느껴지는, 그런 감정이 있다는 것을 처음 경험하는 중이었다. 박하 잎을 입에 문 듯 온몸이 화사하고, 구름다리를 걷고 있는 듯 속이 울렁거렸다.

p.213
시간은 바위도 모래로 만들고 뽕나무밭도 푸른 바다로 변화시킨다. 시간이 지나면 경호의 죽음도 그저 한 줌의 흙이나 나무 같은 것이 될 것이다. 하물며 잠깐 꾸었던 꿈같은 것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바위 같은 약속도, 그것이 없으면 못살 것 같던 꿈도, 아무도 넘볼 수 없이 튼튼한 육체도 한낱 검불에 불과할 것이다. 그때까지는 시간의 등에 올라타고 가만히 있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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