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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경전 : 기억의 소풍(구멍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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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경전 : 기억의 소풍 (구멍가게)
2008.05.12 ~ 2008.05.24
빛 갤러리


인터넷으로 처음 접했을 때는 수채화라고만 생각했다. 편안한 색감에 세밀하게 묘사된 그림이 참으로 정감 있게 느껴지더라. 그러나 미술관에서 직접 그림들을 마주하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작게만 보였던 그림들이 크게 마주하니 펜선으로 그려진 그림이더라. 단순히 세밀하게 그려졌다고만 하기에는 참으로 섬세하게 그려진 그림들이 가슴을 설레게 만들어 준다. 그 설렘은 어린시절 자주 보았지만 요즘에는 보기 힘든 작은 구멍가게의 정겨움이 느껴져 가슴을 설레게 만들어 주었다. 묘한 따스함이 느껴진 작품들... 마주하지 못했으면 정말 아쉬웠을지도 모르겠다.


전시개요

작년 시월에 뽑기, 눈깔사탕 등을 전시장 한 쪽 구석에 차려놓고 옹기종기 둘러 앉아 십여년동안 그리기 시작한 “구멍가게시리즈” 이야기를 조심스레 풀어 놓았다. 늘 이웃과 애환을 같이 해온, 나에게 마음의 위안을 주었던 구멍가게가 점점 기억속으로 사라져감을 아쉬워하며 전시를 마쳤다.

많은 격려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의 일반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통찰력으로 유희적 행위의 “선긋기 쟁이” 에서부터 감동을 주는 이미지의 결과물을 추출하기까지 작가로서의 땀과 고통을 감당하였는가? 라고 내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여행을 떠났다. 그동안 너무 익숙했던 내가 사는 동네들을 벗어나 우리의 삶과 추억을 벗삼아 오랜 세월을 꿋꿋이 버텨 온 구멍가게를 찾아 무작정 낯선 마을에 들어서면 발길부터 설레인다. 마을의 터줏대감처럼 자리했던 가게 터에 새로이 들어선 편의점은 다소 어색한 옷을 입은 것처럼 생소해 보이고, 가끔 한 눈에 반할만한 자태와 맛깔난 이야기가 있는 구멍가게를 발견하면 흥분으로 떨리는 마음을가라앉히고 호기심어린 눈으로 가게 안을 들여다 본다. 세월의 냄새가 느껴진다.

오래된 진열장 위의 잡화 상품들 - 잘 익어 박스안에 담겨 있는 과일, 색색의 과자봉지, 크고 작은 생활용품이 가게의 특징에 따라 조금씩 다르고 주변에 널려있는 물건들을 잘 살펴보면 단지 물건을 사고 판 것이 아니라 정을 덤으로 끼워 파는 그 동네의 정서가 읽혀진다. 먼지끼고, 낡은, 쓰러져가는, 시대에 뒤쳐져 사라져가는 것들의 대표적 상징으로써 구멍가게가 아닌 각각의 생경한 느낌을 풍기는 조형적인 구조와 내 어릴적 기억이 뒤엉켜 그 안에서 에너지를 발산한다.

강원도에서부터 남도 끝자락까지 그 여정은 발길이 머무는 곳마다 내가 그리고자 하는 것에 대한 확신을 주었다. 특히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오른편 뒷골목에 자리한 “석치상회”는 내 그림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 같았다. 주인할아버지의 꼿꼿함이 배어있는 “돌부리산- 石峙”라는 이름하며 반듯한 녹색의 간판글씨체, 두세평 남짓한 자그마한 내부공간이지만 물건들이 촘촘히 정리되어 있고 왼편에는 큰 나무 두 그루가 버티어있어 뒷산자락 오른쪽에 튀어나와 있는 돌부리와 조금 앙칼져 보이는 가게 입구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수 십년의 손때가 묻어 있어 많은 사연이 있을 것 같은 문을 열고 들어가 한동안 발길을 돌려나올 수 없었다. 숨어 있는 듯 하지만 고고하게 따뜻함을 전하는 소통의 장(場), 내가 그림으로 표현하려고 하는 이런 모습의 삶에서 내마음이 순간 정화된 느낌이었다. 추운 겨울이었지만 여행을 하면서 담아온 따뜻한 햇살이 내 그림의 어떤 은유보다도 강했다.

번잡한 도심 속에서 몇몇이 모여 이야기하다보면 어느새 구구절절 동심의 세계로 빠져든다. 동심은 누구에게라도 쉽게 허락된 휴일같은 기억의 소풍이다. 일상에서 벗어난 시간 여행같은 기억의 편린들이 달콤하게 느껴지고 그것들이 응집되어 반영되어지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 깊게 드리워진 겨울 햇살이 비춰지는 구멍가게의 유리창문에 반사되어 흘러내리는 훈훈한 정감 같지 않을까?

나는 이 따스한 기운을 펜촉에 묻혀 날카롭게 그림을 그린다. 가느다랗고 뾰쪽한 직선의 속도감이 모세혈관을 타고 흐르듯, 돋보기로 손금 보듯, 한땀 한땀 바느질하듯 그려 나간다.

무수히 겹쳐진 선으로 긋고 또 긋는다. 서서히 시간의 흐름조차 정지해 버리고 햇살마저 고요에 젖는다. 정중동(靜中動) - 적막하고 조용하나 움직임이 느껴진다. 수시로 드나들었던 출입문의 얼룩들, 깨어진 벽돌, 혼자 서있는 빈 의자, 손길이 다을듯한 과자봉지, 구석구석의 흔적이 쏟아져 내린다. 펜을 잡은 내손은 거의 마비상태다. 건물의 구조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면 기본적인 인간의 습성에 근거한 비대칭균형(asymmetry)의 절묘함이 나타난다. 비틀려 있으면서도 운(韻)이 있고 중심을 잃지 않는 비결은 우리 문화의 “덤 있는 여유, 그냥 그대로의 자연스러움”에서 근거한다.

기호학적 이미지나 기계적 운영체계가 우리 시대의 전반적인 문화트랜드가 되어 버린 지금,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나의 작업이 시대를 역행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억의 감성적 기록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고 소통하는 과정만이 우리가 살아 숨 쉬는 진정한 삶이 아닐까 한다. 이런 맥락에 “구멍가게”가 있다. 앞으로도 삶의 손때가 묻은 이야기를 좀더 가까이 다가서서 내 그림 속에 담고 싶다.

일상에서 만나는 따뜻함 ... 2008. 4. 이미경



- 전시개요 출처 : 빛 갤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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